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드 굴리트 (문단 편집) == 지도자 경력 == 굴리트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축구능력을 갖춘 선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축구감독이 된다면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명제는 굴리트조차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던지 굴리트는 단 한 번의 성공 이후 지도자 경력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파일:external/cdn.fansided.com/1620483-ruud-gullit.jpg]] [[첼시 FC|첼시]]에서 몸담고 있던 1995-96 시즌, [[글렌 호들]] 감독이 잉글랜드 국대 감독으로 부임하자 당시 첼시의 선수였던 굴리트는 선수생활을 유지함과 동시에 첼시의 지휘봉을 잡았다. 1996-97 시즌 그는 입단 당시 리그 11위였던 첼시 FC에서 27년 만의 [[FA컵(잉글랜드)|FA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1997-98 시즌 도중 1998년 2월 12일 리그 2위와 위너스컵-리그컵 8강에 올라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되었다. 경질 사유는 너무 많은 자금을 사용해 팀을 재정난에 빠뜨렸다는 것이었지만 구단주 켄 베이츠와의 불화로 경질되었다는 것이 유력하다.[* 그 자리를 당시 첼시의 스트라이커인 [[잔루카 비알리]]가 메꿔 첼시는 1997-98 시즌을 [[UEFA 컵위너스컵]] 우승과 [[풋볼 리그컵]] 우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제이미 캐러거]]가 1997년 10월 5일에 자신의 커리어 첫 첼시전을 가졌는데 이때 첼시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하자 감독 겸 선수였던 굴리트가 워밍업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자켓만 벗고 경기에 들어와서 뛰었다. 캐러거는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고 있었는데 굴리트가 정말 굉장했다고 회고했다.[* 경기 결과는 리버풓의 4대 2 승리였다.] 경질되긴 했지만 성적이 나빠서 경질된 것도 아니고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10위권 밖을 전전하던 첼시가 강팀으로 오르는 포석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인의 세리에 시절 인맥으로 [[지안프랑코 졸라]], [[로베르토 디 마테오]], [[잔루카 비알리]]같은 오늘날 첼시의 레전드로 꼽히는 이탈리아 선수들을 데려왔고 본인의 자리 역시 첼시 역대급 수비수로 손꼽히는 [[프랑크 르뵈프]]로 대체하는데 성공했으며 후임 감독 비알리는 굴리트의 스쿼드를 그대로 물려받아 그동안 순항 중이던 위너스컵과 리그컵에서 대회 우승이라는 성적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첼시 FC 시절이 굴리트에게 유일하게 성공적인 감독 커리어가 되었다. [[파일:external/www.footballquizzes.co.uk/fdb735ee3d3c636bd24390c4c461c95e.jpg]] [[파일:external/www.nufcblog.co.uk/Screen-Shot-2017-05-09-at-13.02.45.png]] 이후 1998-99 시즌을 앞두고 [[케니 달글리시]] 감독을 경질하고 새 사령탑을 물색 중이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부진한 성적에 선수단 장악에도 실패하며 급격히 입지를 잃어버렸다. 특히 오랫동안 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한 팀의 주장 롭 리의 등번호 7번을 빼앗고 그를 유스 팀으로 강등시켜 팬들의 많은 원성을 샀다. 첫 시즌 리그 13위를 기록한 굴리트는 급기야 1999-00 시즌 5라운드 승격팀이었던 [[선덜랜드 AFC|선덜랜드]]와의 [[위어타인 더비]]에서 팀의 주포 [[앨런 시어러]]를 벤치에 앉히고 기용하지 않는 무리수를 두었고, 팀은 2-1로 패배했다. 사흘 후 굴리트는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바비 롭슨]] 감독이 위기에 빠진 뉴캐슬의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첫 경기에서 [[셰필드 웬즈데이 FC|셰필드 웬즈데이]]를 8-0으로 짓밟는 결과를 얻고 시어러는 이 경기에서 5골을 폭발시켜 굴리트를 머쓱하게 했다. 시어러가 그의 다큐멘터리에 말하길 그때 굴리트가 팀 기강을 잡기 위해 본인을 이용했고, 그때 자신이 싸움에서 밀렸다면 다른 팀으로 이적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여담으로 훗날 시어러와 굴리트는 BBC 매치 오브 더 데이에 함께 나오기도 했다.] [[파일:external/f29e0cc217aca5488f45c26f6d6cb6297e5ae030bcec91d836e7954268932dd7.jpg|width=460]] 200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감독이 되었지만 리그 4위에 컵대회에서도 무관이라는 성적을 얻어 1시즌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굴리트의 후임으로는 [[로날드 쿠만]]의 형 [[에르빈 쿠만]]이 선임되었다.] 여담으로 이 당시 [[송종국]]을 기용하지 않아 [[피파 온라인 3]]을 통해 유명해지기 전까지 대한민국 축구팬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송종국이 [[예스맨]]이어서 기용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송종국이 굴리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조건 '네'라는 말만 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아 사이가 갈라진 것이었다.[* 굴리트와 송종국의 관계를 보면 굴리트는 처음에는 송종국을 주전으로 기용하긴 했지만 자주 송종국의 팀 융합, 전술능력 등을 탐탁지 않아했으며 송종국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기량이 나오지 않는다고도 말했던 적 있었다. 다만 송종국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 송종국이 네덜란드어 학원에도 다니고 있다고 말하며 송종국을 믿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2년이 지났는데도 송종국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자 언어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구단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말하고 그를 벤치에 앉혔던 것이다.] 송종국 본인도 굴리트의 축구는 자기와 잘 맞지 않았다고 했는데, 굴리트 입장에서 보면 송종국이 본인의 말에 '네, 네'라고 말하면서도 본인의 지시와 다른 플레이를 보여주니 [[네덜란드어]]를 이해 못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나 생각했을 법하다. [[파일:gullit_789483c.jpg]] 2006년 [[메이저 리그 사커]] 감독들 중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조건으로 [[데이비드 베컴]]과 [[홍명보]]의 전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갤럭시]]의 감독직에 취임했으나 성적 부진 및 팀원들과의 갈등을 이유로 2008년 8월 11일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굴리트를 LA 갤럭시로 데려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알렉시 랄라스]] 회장 역시 굴리트의 성적 부진과 데이비드 베컴의 에이전트와의 부정적인 유착관계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굴리트가 사임하던 날 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굴리트는 본인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 경력에서 라이벌 [[디에고 마라도나]]와 유사한 길을 걸었고, 같은 [[오렌지 삼총사]]였던 [[마르코 반 바스텐]]과 [[프랑크 레이카르트]]와는 달리 씁쓸한 경력을 가지게 되었다.[* 판바스턴은 네덜란드 국대를 맡았던 적 있었고 레이카르트는 [[FC 바르셀로나|바르셀로나]] 드림팀 2기의 감독을 맡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문제는 그들의 후임들이 [[넘사벽]]의 업적을 세웠다는 것인데, 바르셀로나는 [[펩 과르디올라]]를 만났고, 네덜란드는 [[베르트 판마르베이크]] 아래에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2010년 남아공 월드컵]] 준우승을 달성했다. 한편 반 바스텐, 레이카르트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던 적 있지만 굴리트만 유일하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적이 없다.] 현재는 감독 활동을 접었으며 [[FIFA]]가 주최하는 공식 행사를 뛰며 사회를 자주 보고 있다.[* 2020년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된 [[더 베스트 FIFA 풋볼 어워드]] 시상식에 사회자로 깜짝 등장했고 재치있는 진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손흥민]]이 [[FIFA 푸스카스상]]을 수상할 때 사회자를 보았다.] 이 외에도 여러 나라들의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면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